바둑의 유래는 대부분 고대의 전설에 의존하는 형편이며, 사실(史實)이
기록된 문헌도 드물다. 그러한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고대 중국의 요(堯)·순(舜) 임금이 어리석은
아들 단주(丹朱)와 상균(商均)을 깨우치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이다.
중국의 고전 《박물지(博物誌)》에 실린 '요조위기 단주선지(堯造圍棋
丹朱善之)'라는 문구에 따르면 기원전 2300년전 요왕이 아들을 위해 바둑을 발명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가 하면 《설문(說文)》에는 기원전 2200년경 순왕이 우매한 아들에게
바둑을 만들어 가르쳤다고 밝히고 있으며, 《중흥서(中興書)》에도 '요순이교우자야
(堯舜以敎愚子也)'라는 글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듯 내용 자체가 다분히 전설적인데다 구체적이지 못해서 이 '요순창시설'의 사실적
근거가 확실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어리석은 아들'이라면 바둑을 배우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모순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경(農耕)사회였던 고대에는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우주와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연구하는 도구로서 바둑이
발명되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고대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한 황하유역에는 해마다 홍수가 범람하여 선사시대
때부터 자연스럽게 천문학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하던
도구가 발전되어 오늘날의 바둑이 되었다는 설이 과학적인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대바둑의 틀과 수준을 진일보시켜 '영원한 기성(棋聖)'으로 불리는
중국 천상열차분야지도 출신의 우 칭위엔(吳淸源) 九단은 바둑의 유래에 관해
"요왕이 아들 단주에게 놀이도구로써가 아니라 천문을 연구하는 도구로써 바둑을
가르쳐주었을 것"이라며 앞서 두가지 설을 연결시킨 추론을 편 바 있다.
즉, 역학(易學)이나 제례(祭禮)에 관한 교양을 터득하라는 뜻에서 바둑을 가르쳤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승려 도림(道林)이 백제의 개로왕과 바둑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백제문화가 일본에 전파될 때 바둑도 함께 건너간 것으로 추측된다.
일각에서는 기자조선(箕子朝鮮)시대 때부터 바둑이 두어졌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적 근거는 불확실하다.
국내 기보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1765년 영조 41년 민백흥(閔百興)이 쓴 <기론>이다.
<기론> 은 서명날인과 기론, 상수도, 기보 등이 편철된 책으로, 이 필사본은
그동안 1900년대 초반에 머물러 있던 한국 기보의 최초 연도를 무려 150년이나 앞당긴 한국 최고(最古)의 기보다.
<기론>은 바둑을 초연수(焦延壽, 한말의 역학자), 사마광(司馬光, 1016∼1086) 등의
역사상(易思想)으로 파악하려한 것이 특징이다.
저자인 민백흥은 바둑을 일개 오락으로 보지 않고 주역의 한 방편으로 이해하려 했다.
고대 중국에서 발명된 이래 한국과 일본에 전파되어 일부 상류층 사이에서만
행해지던 바둑이 본격적으로 근대적인 게임의 토대를 갖추게 된 것은 중세 일본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일본 막부(幕府)시대에 바둑은 국기(國技)로 적극 지원을 받으면서 바야흐로 르네상스를
맞게된다. 바둑을 업(業)으로 삼는 기사(棋士)제도와 본인방(本因坊)등의 바둑가문이
생기고, 이들에 의해 룰이 정비되며 각종 이론, 정석이 태어나는 등 비로소 근대경기로서의 틀과 체계가
세워졌던 것이다.
그리고 20세기에 이르러 가문세습제도 대신 협회(일본기원)와 프로제도가 탄생하고,
신문사들이 기전의 스폰서로 나서면서 오늘날 현대바둑의 틀을 갖추게 된다.
한편, 한국에서는 현재의 바둑과는 달리 돌들을 미리 배치하고 두는 고유의 순장(巡將)
바둑이 20세기 초반까지 성행했는데, 현대바둑이 도입된 것은 해방후 일본에
바둑유학을 다녀온 조남철 九단의 의해서이다. 특히 현대바둑 보급에 일생을 바친
조남철 九단의 선구적 노력에 힘입어 당시까지만 해도 한량들의 잡기 취급을 받던
바둑이 오늘날 본격적인 정신스포츠로 자리매김되기에 이르렀다.